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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 영혼을 비추는 빛의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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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오라나 2023. 8. 21.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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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에 대해 알아보기 전에 우리는 먼저 바로크 미술과 카라바조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바로크 미술

바로크는 포르투갈어로 '찌그러진 진주'라는 뜻으로 우아한 고전양식에 비해 지나친 장식과 과장된 표현에 대한 조롱의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대상의 역동적인 형태를 포착하여 표현했으며, 빛과 어두움의 극명한 명암대비가 특징적입니다.

대각선적인 구도와 원근법, 단축법 등을 활용하기도 했습니다.

17세기 바로크 회화의 창시자 카라바노는 바라크 회화의 핵심적인 기술인 카이로스쿠로(명암법) 혹은 텔레브리즘을 발명했습니다.

연극적 사실주의라고 불리기도 하며, 그림은 빛에 의한 연출효과가 뛰어난 그림입니다.

대표작으로는 <의심하는 도마>가 있습니다.

 

렘브란트의 어린시절

렘브란트 반 레인 (1606-1669) REMBRANDT VAN RIJN

렘브란트는 1606년 네덜란드 레이덴에서 제분업자의 9번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레이던 대학교에 입학했으나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그림을 그리는데 열중하자 그의 부모는 화가 스바넨부르흐에게 3년 동안 미술수업을 받게 해 주었습니다. 이후 그는 암스테르담에 가서 가장 유명한 화가인 피터 라스트만에게 6개월간 그림을 더 배우기도 했습니다.

이후 1626년 20살의 렘브란트는 아버지의 제분소 한 공간을 작업실로 마련해 스튜디오를 운영하며 많은 자화상을 그렸습니다.

그는 자신의 상을 포착하기 위해 거울을 사용해 다양한 표정을 지어보며 연구했습니다. 자화상뿐 아니라 다양한 극정인 장면에서도 이런 감정들을 전달하고자 노력했습니다. 후에 이것은 자아에 대한 탐구뿐 아니라 미술에 대한 탐구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22세의 렘브란트

 

렘브란트 조명

23세의 렘브란트

23세의 렘브란트는 일명 '렘브란트 조명'이라고 불리우는 기법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은 인물을 강조하기 위해 빛의 밝음과 어두움을 극적으로 대조시킴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얼굴에 역삼각형 모양의 조명이 나타나는 것을 뜻합니다. 이 렘브란트 조명은 오늘날에도 널리 쓰이고 있습니다.

렘브란트 조명

 

암스테르담의 슈퍼스타

1631년 26세의 렘브란트는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했습니다.

당시 네덜란드는 다른 유럽국가와 달리 왕이나 귀족이 아닌 상업으로 부를 쌓은 부르주아 계급들이 나타나고 있던 시기였고, 부자가 된 상인들이 자신의 부와 명예를 과시하기 위해 초상화 수요가 많아지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렘브란트는 모피상이었던 루츠의 초상화를 그리며 초상화가로서 입지를 다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의 초상화는 지체높아 보이며, 연극적인 연출로 다른 초상화와 뚜렷한 차별점을 보였습니다.

니콜라스 루츠의 초상화(1931)

이후 암스테르담 의사협회에게 의뢰받은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가 호평을 받으며 당대 최고의 화가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1932)

당시의 다른 집단초상화와 비교해보면 렘브란트 작품과의 차이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후 그는 10여년 동안 부와 명예를 쌓으며 인생의 황금기를 보내게 됩니다.

명문가의 딸인 사스키아와 결혼하며 상류사회에 진출하게 되었고, 그녀가 가져온 많은 지참금으로 부와 명예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렘브란트는 그림의 소재를 구입한다는 이유로 수많은 예술품과 사치품을 사들였고, 호화로운 주택을 구입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내 사스키아는 결혼생활 동안 3번의 유산을 하는 아픔을 겪으며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29세에 그린 <술집의 방탕아>에는 사스키아와 인생의 황금기를 누리고 있는 렘브란트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보입니다.

술집의 방탕아(1635)

사스키아는 아들 티투스를 낳았지만 1942년 30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어린 아들의 미래가 걱정되었던 사스키아는 자신의 유산을 아들 티투스가 성인이 될 때까지 상속받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렘브란트는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하면서도 작품에 대한 연구를 놓지 않고 자신의 양식을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그 과정에서 전환점이 된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 바로 <야경꾼들>입니다.

이 그림에 렘브란트는 사스키아를 등장시키기도 하고, 초상화를 의뢰한 사람들의 요구에 맞추기보다는 자신의 자신의 예술성을 추구했기 때문에 렘브란트의 초상화 인기는 점차 줄어들게 됩니다.

렘브란트의 사치와 초상화 의뢰가 줄어들며 렘브란트의 형편은 점차 어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렘브란트는 어린 티투스를 키우기 위해 집안에 하녀로 들어온 헨드리키에와 사랑에 빠져 재혼을 했습니다.

헨드리키에는 총명하며 헌신적인 여인으로 티투스와 자신의 이름으로 회사를 만들어 렘브란트의 그림의 판매를 도맡았습니다.

또한 48세의 나이에 헨드리케와의 사이에서 땋을 얻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50세의 렘브란트는 부와 명예를 잃고 파산을 하게 됩니다.

제욱시스로 분장한 자화상(1659)

이 시기에 그려진 <제욱시스로 분장한 자화상>은 렘브란트의 자화상은 삶을 달관한 듯한 모습마저 보여줍니다.

이후 1663년 헨드리키에가 사망하고, 68년 아들 티투스마저 사망했습니다.

이제 렘브란트 곁에 남은 것은 헨드리키에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뿐이었습니다.

렘브란트의 사망 원인은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아사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자화상(1665)

1665년 59세에 그려진 렘브란트의 자화상은 곤궁한 그의 처지를 보여주고 있으나 붓과 파레트를 든 손과 눈빛에서 화가로서의 자부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의 신부(1666)

힘든 삶을 살았던 화가 반 고흐는 렘브란트 말년의 작품인 <유대인의 신부>를 보며 이와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이 그림 앞에 앉아 2주를 더 보낼 수 있게 해 준다면 내수명에서 10년이라도 떼어주겠다.

 이 얼마나 큰 유대감인가, 또한 마음을 울리는 궁극의 작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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