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로랑생은 1883년 프랑스 파리의 샤브롤 거리에서 당시 44세였던 알프레드 스타니슬라스 툴레와 22세의 가정부 폴린 로랑생의 사생아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세무 감사원으로 일하다 후에 국회의원을 지낼 정도로 부와 명예를 가진 사람이었고, 그녀를 정식 딸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어머니에게 충분한 양육비와 모녀가 살 수 있는 아파트를 구해주기도 했습니다.
모녀의 삶에 실크모자를 쓴 신사가 자신들을 찾아왔으나 아버지에게 진짜 가정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야 자신이 그의 사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위압적인 태도에서 그녀는 남성적인 존재에 대한 위화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도움으로 그녀는 명문 사립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가 선생님이 되길 원했지만, 어느 날 마차 밖의 풍경을 보고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열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어렵게 어머니를 설득한 마리 로랑생은 파리 시립학교에서 화가 '주아스 푸트렐'에게 데생을 배우고, 세브르에서 도자기에 그림 그리는 법을 배웠으며, 1904년에는 왕베르 아카데미에 입학해 '외젠 키뇨르'의 제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곳에서 마리 로랑생은 '조르주 브라크', '프란시스 피카비아', 조르주 르파페 등과 함께 수학하며 젊은 예술가로서의 꿈을 키워나갔습니다.
또한 마리는 여성화가인 '마리 엘리자베스 루이스 르 브룅'의 초상화를 목탄과 연필로 모사해 "재능이 있다"는 평가를 받게 됩니다.
마리 로랑생은 브라크의 주선으로 '세탁선'에 출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미술사에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세탁선은 새로운 예술을 모색하는 마티스, 브라크, 드랭, 피카소등.. 세계 각지에서 모인 젊은 예술가들의 아틀리에이자 공동체입니다.
1907년 세탁선 친구들의 권유로 마리 로랑생은 '앙데팡당전'에 출품을 하기도 했습니다.
또 피카소의 소개로 만난 이탈리아 작가 '기욤 아폴리네르'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시인이자 예술운동을 이끄는 선구자였던 아폴리네르와 함께 세계 곳곳의 재능 있는 예술과들과 어울리며 '예술가의 예술가'로 불리게 됩니다.
1912년 마리 로랑생은 '바르바쥬 화랑'에서 처음으로 개인전을 개최했고, 피카소는 그녀의 작품 [꿈꾸는 자]를 구입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녀의 작품 [젊은 처녀들]이 유명인들에게 고가로 거래되자 유럽 화단은 그녀에게 주목하게 됩니다.
한편, 화가로서의 명성을 쌓아가던 그녀는 영원의 동반자 일 거라 생각한 아폴리네르와 결별했습니다. 아폴리네르의 대표작인 시 [미라보 다리]는 마리 로랑생과의 이별의 아픔을 표현한 작품입니다.
*미라보 다리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 강이 흐른다
우리 사랑을 또 다시
되새겨야 하는가
기쁨은 언제나 슬픔 뒤에 왔었지
밤이 오고 종이 울려도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
손에 손잡고 얼굴 오래 바라보자
우리들의 팔로 엮은
다리 밑으로는
끝이 없는 시선에 지친 물결이 지나가고
밤이 오고 종이 울려도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
사랑은 가버린다 흐르는 이 물처럼
사랑은 가버린다
이처럼 삶은 느린 것이며
이처럼 희망은 난폭한 것인가
밤이 오고 종이 울려도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주일이 지나가고
지나간 시간도
사랑도 돌아오지 않는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센 강이 흐른다
밤이 오고 종이 울려도
세월은 가고 나는 남는다
1914년 마리 로랑생은 자신의 후원자였던 독일인 남작 '오토 폰 뷔체'와 결혼하며 프랑스 시민권을 상실하게 됩니다. 이후 세계 제1차 대전이 발발하여 남편과 함께 스페인으로 긴 망명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성공하기 시작한 작가생활이 끝날 수 있다는 불안감과 잦은 이사로 괴로운 생활이 이어졌고, 그녀의 유일한 위안은 그림을 그리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녀는 파리에 대한 그리움, 망명 생활의 괴로움 속에서 [진정제]라는 시를 쓰기도 했습니다.
*진정제
지루하다고 하기보다 슬퍼요.
슬프다기보다 불행해요.
불항하기 보다 병들었어요.
병들었다기보다 버림받았어요.
버림받았다기보다 나 홀로.
나 홀로라기보다 쫓겨났어요.
쫓겨났다기보다 죽어 있어요.
죽었다기보다 잊혀졌어요.
이후 독일에 정착한 마리 로랑생은 남편의 거친 모습에 혐오감을 갖고 이혼을 하고, 1921년 홀로 파리에 돌아왔습니다.
로젠버그 화랑에서 성황리에 개인전을 치른 마리 로랑생은 사교계의 유명인사들과 교류하며 초상화 주문을 받기도 하고, 발레단의 의상과 무대를 디자인하며 승승장구하게 됩니다.
성공한 그녀는 에펠탑이 보이는 호화로운 아파트에 거주하며,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로 피카소, 마티스 등과 함께 사진작가 만 레이의 모델이 되기도 합니다. 또한 1937년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파리를 떠나 피난을 떠났고, 다시 돌아온 나치 점령의 파리에서 녹록지 않은 생활을 이어가게 됩니다.
해방 후 그녀는 이전에 꺼려하던 색을 과감하게 사용하며 새로운 스타일의 작품을 선보였고, 뉴욕과 런던에서 개인전을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다양한 분야로 활동영역을 넓혀갔으며, 종교에 심취하기도 했습니다.
1956년 6월 8일 심장마비로 자택에서 숨을 거둔 마리 로랑생은 흰 드레스에 장미 한 송이를 손에 쥐고 연인이었던 아폴리네르의 편지다발을 가슴에 놓은 채 페르 라셰즈 묘지에 묻힙니다.
남성 위주의 화단에서 마리 로랑생의 이름은 점차 잊혀 갔지만 연구자들의 노력을 통해 다시금 재평가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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